똑 닮은 어떤 거리들의 풍경 / 진선
항구 뒤에 있는 요코스카의 주요 거리를 돌아보았다. 오키나와나 동두천, 평택을 다녀온 입장에서 요코스카의 거리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요코스카의 특색이 더해진 스카잔(요코스카의 주일 미군들이 낙하산 천 등으로 만든 점퍼에 동양풍 자수를 넣은 것에서 유래함) 정도만 빼면 군사문화를 관광상품으로 소비하고 있는 풍경도, 미군들에 의해/미군을 위해 지어진 온갖 이국적인 가게들도 전형적인 미군 기지 근처의 모습 같았다.
함께 필드워크에 참여한 한국 기지촌 여성 연구자는, 길을 걸으며 당시 성매매 여성들이 일하고 있었을 만한 장소들을 짚어내기도 했다. 기지 반대 운동 소개 후에 해당 여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활동가들에게 질문했을 때, 아무도 그들의 행방을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국가라는 주체들에 의해 폭력에 휘둘리는 약자들 사이에도 이른바 순위가 있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약한 존재일수록 더 쉽게 잊히고 만다.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 위한 과정 자체가 평화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한 일이었다.
조금도 멋지지 않은 / 김엘림
공간사의 기록 속에서나 당대 언론의 보도들에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참전 경험에서도 ‘사실은 이들이 무서워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도통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느낄 법한 두려움이나 공포, 순간순간 흔들리는 마음들에도 공적 역사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감정들은 이들의 용감함과 애국심, 영웅성을 보여주는 데 불필요한 것을 넘어서 되려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공적 역사의 기록 속에서 여군들은 ‘나약한 여성의 몸’을 극복했을지언정, ‘무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감정들은 그들의 공적을 드높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삭제되어버리고, 남은 것은 ‘군인다움’을 보여주는 수식어들뿐이죠. 하지만 전쟁의 진짜 모습은 그런 굳어버린 글들에 있지 않습니다.
기억을 온전히 흡수하는 일: 평화하기 투어리즘
/ 카지 히로모토
이태원은 말할 필요도 없이 '평화하기' 투어리즘의 현장입니다. 다양한 이들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죠. 사고가 난 지 9개월 정도 지난 2023년 7월 26일, 피스모모의 초청으로 ‘COMPSA 2023: 모두의 것으로서의 평화와 안보’ 컨퍼런스에 참가한 후 저는 인천공항이 아닌 이태원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서울을 방문하기로 결정된 이후, 저는 이 현장에서 ‘소리 없는 “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온전히 흡수해내야한다는(‘그렇게 하고 싶다’와 같은 개인의 욕구와는 다른) 책무를 느꼈습니다.
착취의 장소에 대한 감각 in 베트남 / 이슬기
숙소에 돌아왔는데도 코점막에 그 비릿한 냄새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계속 그 냄새에 노출되어 살고 있을텐데... 누가 냄새를 안 맡고 살 수 있고, 누가 냄새를 맡아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그로 인해 어떤 질병에 걸리는지, 어느 지역의 생태계가 파괴되는지, 이런 것들이 위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글로벌화된 산업체제 속에서의 생산과 소비의 구조에 대해, 여기에 나는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에 대해, 착취의 지정학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주불능' 지역으로 내몰리는 존재들 / 김지연
수십 년 안에 국토 전체가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위기에 직면한 남태평양 섬나라 투발루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책으로 일종의 가상국가인 디지털 국가(Digital Twin)를 제시했다. 이는 투발루라는 국가가 존재했다는 기록을 보존하는데 그 목적을 지니고 있다. 앞서 투발루는 영토가 사라지더라도 합법적으로 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대로라면 통상 국가 구성의 3요소 중 하나인 영토가 삭제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투발루에 이어 몰디브, 마셜 군도 등 태평양 섬나라들이 기후변화로 인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소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장소를 기반으로 한 로컬·커뮤니티의 역사와 문화 소멸이 연쇄적으로 진행되면서 다양성이 가진 힘을 점점 상실해간다는 것이다. 이는 생존을 위한 다양성 확보는 비단 생태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를 돌보는 춤,
훌라를 다시 추기까지
/ 한나
어릴 때부터 춤을 추고 싶어했지만, 동시에 춤추는 걸 두려워했다. “넌 발레를 배우기엔 유연하지 않아.” “장기자랑을 서기에는 춤 실력이 좀 모자란걸?“ ”음....약간 어색하고 부족해. ”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다 2016년 가을, 우연히 훌라를 만났을 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마음이 편했던 댄스 시간이었다. 잘 추고, 못 추고를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어느 날은 두 손으로 심장 모양으로 만들어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에는 비치 보이가 있는 바닷가를 상상하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도 했다. 태양과 파도를 내 손으로 만들어낼 때,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신이 났다. 스무 해 넘게 긴장하고 있던 내 몸은 평화로운 노래와 춤에 홀리듯 이끌렸다. 그때 내 본능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훌라를 추면 내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지겠구나. 나를 더 잘 돌볼 수 있겠구나!
[+오디오]여군, 여성에 갇혀버린 / 엘림
남자만큼, 아니 남자보다 더 뛰어나야 했던 그 시절 여군들은, 그래서 진짜 군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제 답은 ‘그렇다’이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다’입니다. 이게 무슨 궤변이냐 하면… 여군들은 성공했지만, 군과 사회는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군은 당시의 여군들을 여성-‘군인’이기보다 ‘여성’-군인으로 취급함으로써, 이들을 온전한 군인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상상된’ 남성과 싸워야만 했던 여군들은 남자의 몸을 갖지 않았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늘 2등 군인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여자의용군을 그려내는 수식어로 흔히 사용됐던 ‘어린 딸들, 연약한 몸, 나약한 소녀’ 따위의 표현들은 이들이 정규군이 되고서도 여성의 몸을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주죠.
불안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안정감을 찾아갈 수 있을까?
/ 홍주리
내가 자란 집은 무척 엄한 분위기였다. 단 한시도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친구 집에서 놀다가 늦게 귀가를 한다거나 방이 조금이라도 어질러져 있으면 종아리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으며 폭언을 들어야 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가출을 하는 꿈을 꿨다. 반대로 5살 아래의 남동생은, 조금이라도 자기 몸에 회초리가 닿을 것 같으면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보다 훨씬 크게 혼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느라 잘못을 빌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동생은 나보다 빨리 잘못을 인정했고 나보다 덜 맞고 덜 혼났다.
그래서 나와 동생의 집에 대한 기억은 다르다. 동생은 집보다 바깥이 더 무서웠고 나는 집이 너무 무서워서 바깥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4년 전인 2019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은 집으로 틀어박혔고 나는 오히려 밖으로 더 나돌아다녔다. 이런저런 시민사회단체 활동들을 하면서도, 내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냥 나와 내 가족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다거나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오디오]그들이 숨기는 방식 / 가연
1970년대부터 필리핀 내 미군 주둔과 핵무기 사용 반대 활동을 조직하고 있는 코라존 파브로스(Corazon Valdez Fabros)는 온라인으로 진행된 더슬래시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이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위협’이라고 말합니다. 2023년 들어 일본과 한국은 물론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은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한 층 강화하고 있고, 미군기지를 개선 및 확대하기 위해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정부 또한 4월 3일, 미군이 사용할 기지 4곳의 위치를 밝히며, 미군이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군사 기지 ‘인프라 투자’에 8,200만 달러가 넘게 ‘자금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코라는 이러한 국방 예산 투입을 통한 군 시설 현대화는 결국 필리핀 내 미군기지 설치를 위한 ‘속임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무업기간에도 안전할 수 있다면
/ 박은미
2019년 30대 후반의 나는 사회에서 말하는 니트족이었다. 일하지도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계약직 일을 전전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하지만 더 괴로웠던 건 앞으로도 내 이력서로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거란 사실이었다. 일을 하고 싶지 않은게 아니었다. 하지만 30대 후반의 나이, 지방대 출신, 6번의 무업기간, 가임기여성, 이력서에 내세울 기술이나 특별한 커리어가 없는 나는 구직시장에서 쉽게 배제되었다. 반복적인 구직실패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자기혐오로 일상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만 이런가?’ 마지막 무업기간을 보내며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 사회와 단절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동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과 함께 무업기간을 활력있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니트생활자 활동의 시작이었다.
노동, 자본주의 피라미드를 비틀다
청소년 노동권,
총체적 권리로 접근해야 / 이수정
청소년과 노동, 그리고 인권이 만나는 현장에는 늘 ‘청소년이 무슨 노동이냐’는 질문이 있다. 마치 편의점, 식당, 스터디 카페, 제조업체 포장 라인, 뮤지컬 극장 무대 위에 있는 청소년 노동자가 안 보이는 것처럼 묻는다. 우리 곁에 있는 청소년 노동자는 플랫폼 업체에서 일감을 받아 영상 편집을 하고, 따뜻한 음식을 배달해 준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학습하느라 중노동에 시달리고, 집안일을 하느라, 아픈 가족을 돌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는 이도 있다. 임금노동이든 비임금 노동이든 청소년의 삶은 결코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청소년과 노동, 인권 사이 거리는 멀기만 하다.
남자만큼, 아니 남자보다 더!
/ 김엘림
여자의용군 모집 경쟁률이 그리도 높았다는데, 육군은 과연 어떤 여성들을 뽑았던 걸까요? 모집과 선발, 훈련, 배치 및 그 이후의 복무 전반에 이르기까지 여자의용군은 남성들만큼, 아니 남성들보다 더 우수하고 더 탁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남성들만의 공간인 군에 여성이 들어오려면, 일반 남성 사병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차별화’가 가능해야 했던 것이죠. 가장 손쉽고 명확한 차별화의 지점은 바로 ‘학력’이었습니다.
정치 산업 내 의사결정권자가
다양해지려면/ 박혜민
2020년 가을, 회사를 관두고 쉬는 중에 바쁠 때는 잘 들리지 않던 정치 소식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평화로운 일상에 방해가 되는 걸 넘어서 우울감을 줬다. 실망스러운 사건이나 상황도 마음을 갉아 먹었지만 나를 애닳게 한 건 나와 내 친구들의 삶을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거였다. 선거 때면 매번 되풀이하던 왜 자꾸 비슷한 사람들이 또 나오는 거냐는 푸념에 백수의 한가함이 더해져 어느새 진지한 질문이 되었다. 내 또래는 몇 명이나 있는지 궁금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트에서 여러 통계 자료를 뒤적이다가 생각보다 너무 낮은 비율에 놀랐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만 39세 이하 정치인은 전체의 6%, 후보자 비율은 전체의 7% 였다.
모두의 힘을 아는 사람
/ 가연
주일 미군 기지의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곳, 오키나와.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이는 미군기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오키나와 반환 50주년이었던 지난 2022년 5월, 후텐마 기지를 헤노코 지역으로 이전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벌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현 기노완시 출신의 진시로 모토야마(Jinshiro Motoyama, 이후 진시로)님의 이야기입니다.
향기 있는 시간을 위하여
/ 오은영
지난 2월 하순 열흘이 채 안 되는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일정이 짧아서였는지 여행 내내 시차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고 지금까지도 뒤죽박죽이 된 수면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시간 감각의 손상 같은 것(아마도 시차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지만)을 경험할 때면 종종 현실과 괴리된 것처럼 느껴지는데 멀어진 그 현실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익숙한 공간과 사물에 기댈 필요를 절감하곤 합니다. 늘 만나던 사람들, 머물던 장소, 사용하던 물건들. 그런 존재들을 느낌으로써 서서히 시간과 나를 밀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갈 수 없다면 / 덴마
최소한의 기본권인 화장실을 사용할 권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화장실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져버린다. 이처럼 화장실은 가장 사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며, 화장실이 제시하는 ‘정상’의 기준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을 규율한다. 다양성과 포함의 가치가 외면되는 이 사회의 단면이 공간적으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픽토그램부터 여성=치마, 남성=바지라는 표식으로 우리의 존재를 납작하게 만든다. 화장실이 그저 화장실일 수는 없을까?
잠깐, 오빠의 승리를 비는 거 말고요 / 김엘림
2022년 1월, 웬 편지 하나가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군인 조롱 위문편지’ 논란이었죠. 내용도 그렇지만 그 이후의 신상털이, 사이버불링까지 관련 뉴스가 한동안 이어졌던 것을 많이들 기억하실 겁니다. 처음 문제의 편지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느낌은, 뭐랄까요... 절반의 경악과 절반의 한탄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이런 거죠. “아직도 이런 걸 쓰고 있다고?”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게
/ 가연
안보라는 이름으로 시민의 접근이 제한된 정보와 이를 빌미로 휘두르는 두려움의 정치는 국제 사회의 위계가 더해진 미군기지에서 극대화됩니다. 북한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군사적인 긴장감을 한껏 높이고 있는 지금, 미군은 이미 주둔하고 있는 기지들을 재배치하는 등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이미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조율하지도, 널리 알리지도 않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결정되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더슬래시는,
평화와 커먼즈의 관점에서 현실을 조망하고 사유하는 언론을 표방합니다.
현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수많은 만남 속에서 변화하고 또 변화합니다.
그렇기에 더슬래시는,
그 변화의 방향이 ‘모두의 것으로서의 평화’를 향하도록
고유한 속도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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